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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에서 새 시리즈가 공개될 때마다 저는 배우 라인업보다 소재부터 먼저 봅니다. 아무리 좋은 배우가 나와도 소재가 밋밋하면 끝까지 보기가 쉽지 않거든요. 그런데 《들쥐》는 달랐습니다. '내 신분을 누군가 통째로 빼앗겼다'는 설정 하나가 저를 1화에 붙잡아 놨고, 결국 열 편을 다 봤습니다. 류준열, 설경구 주연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로, 카카오웹툰 원작을 김홍선 PD가 연출했습니다.
신분 도용이 아니라 '정체성 탈취' — 소재가 이 드라마의 전부다
저는 보통 드라마를 볼 때 1, 2화 지나도 몰입이 안 되면 그냥 끄는 편입니다. 《들쥐》는 1화부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라는 의문이 생겨서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주인공 재문제는 공황장애(panic disorder)를 앓는 은둔형 소설가입니다. 공황장애란 갑작스러운 극심한 불안 발작이 반복되는 불안장애의 일종으로, 일상적인 외출조차 어렵게 만드는 증상입니다. 3년째 집 밖을 나가지 않고, 모든 사회적 관계와 재산이 단 한 명의 친구 이름 아래 관리되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자신의 집이 이미 팔렸다는 사실이 통보됩니다.
제가 직접 봤는데, 이 장면이 생각보다 훨씬 섬뜩했습니다. 부동산 직원이 버젓이 남의 집을 구경시켜 주는 상황, 친구 번호는 결번이 되어 있고, 은행 지문 인식도 먹히지 않습니다. 경찰서에서 지문을 조회하니 아예 등록된 신분 자체가 없습니다.
이건 단순한 신분 도용(identity theft)과는 다릅니다. 신분 도용이란 타인의 개인정보를 무단으로 사용하는 범죄를 말하는데, 《들쥐》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소설가로서의 이력, 친구 관계, 사람들의 기억 속 자리'까지 다른 누군가가 채워버린 상황을 설정했습니다. 정체성 탈취(identity usurpation)라는 표현이 더 맞습니다.
실제로 국내에서도 노숙인이나 취약계층의 명의를 이용한 대포통장 개설, 개인정보 불법 유통 등의 범죄가 꾸준히 발생하고 있습니다. 출처: 경찰청 공식 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듯, 사이버 범죄 신고 건수는 매년 증가 추세입니다. 드라마가 허구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시의성 있는 소재는 시청자를 오래 붙들어 놓습니다. 3화쯤부터는 화면을 끄기가 아깝다는 느낌이 확 들었고, 매 에피소드 끝에 작은 사건이 하나씩 터지면서 다음 화를 자연스럽게 누르게 만드는 구조였습니다.
- 공개일: 넷플릭스 금요일 공개, 총 10부작, 회당 약 50분
- 연령 등급: 19세 이상 (폭력·욕설 포함)
- 원작: 카카오웹툰 루드비콘 작가의 웹툰 《들지》
- 연출: 김홍선 PD (《보이스》,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 등)
- 극본: 이재곤 작가 (《모범 가족》 등)
요약: 단순 신분 도용을 넘어 정체성 전체를 빼앗긴다는 설정이 현실 범죄와 맞닿아 있어, 소재만으로도 충분히 흡입력이 있었습니다.
배우 연기와 아쉬운 점 — 3인방은 좋았고, 후반부는 아쉬웠습니다
《들쥐》에서 가장 기대하면서도 걱정했던 부분이 바로 1인 2역(dual role)이었습니다. 1인 2역이란 한 배우가 외모가 동일한 두 인물을 연기하는 방식으로, 말투·표정·동선의 차이만으로 두 인물을 구별해야 하는 고난도 연기입니다. 류준열 씨가 소설가 재문제와 그의 복제품인 '들지'를 동시에 맡았는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두 캐릭터의 체온이 꽤 다르게 느껴졌거든요.
들지로 나올 때는 움직임이 좀 더 가벼우면서 계산적인 느낌이 있고, 재문제로 나올 때는 내면이 무너지는 사람 특유의 긴장감이 있었습니다. 중간에 재문제가 자신 안의 또 다른 심리적 균열을 드러내는 장면에서의 연기는 제가 보기엔 이 시리즈 최고의 장면이었습니다.
설경구 씨가 맡은 '노자' 캐릭터는 이 드라마의 무드메이커입니다. 노자라는 별명은 사람을 죽이기 전 5만 원짜리 지폐를 뿌린다는 데서 유래했는데, 이처럼 극단적인 설정임에도 불구하고 설경구 씨 특유의 무게감 덕분에 느와르(noir) 장르 — 어둠과 범죄를 특유의 음산한 분위기로 담아내는 장르 — 특유의 묵직함이 살아났습니다. 특히 자기 부하의 죽음을 안 뒤 비닐하우스 앞에서 핸드폰을 빌리고 삼겹살을 빼앗아 먹는 장면은 대사 한 마디 없이도 캐릭터가 다 설명됐습니다.
형사 박순용 역의 이규영 씨도 제 생각에는 이 드라마의 숨은 공신입니다. 팀장과의 케미스트리(chemistry) — 두 캐릭터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자연스러운 호흡과 긴장감 — 가 좋았고, 너무 무겁지 않게 드라마를 풀어주는 역할을 해줬습니다.
다만 아쉬운 점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제가 제일 불편하게 느꼈던 건 후반부 산속 시퀀스입니다. 넓은 숲에서 주요 인물들이 기가 막히게 같은 지점에 모이고, 경찰이 구덩이를 찾아내는 타이밍도 너무 맞아 떨어졌습니다. 서사적 개연성(narrative plausibility) — 이야기 안에서 사건과 인물의 행동이 납득 가능하게 연결되는 정도 — 이 흔들리는 구간이었습니다.
출처: 영화진흥위원회(KOFIC)의 장르 분석 자료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에서 시청자의 이탈 원인 1위는 개연성 붕괴입니다. 《들쥐》도 이 지점에서 약간 발이 걸렸습니다. 제 경우엔 8화를 보면서 한 번 흐름이 끊겼고, '10부작을 8부작으로 줄였다면 훨씬 타이트했겠다'는 생각을 지우기가 어려웠습니다.
노자 캐릭터도 재밌었지만, 제 경험상 이 정도로 목숨을 건 동행을 설득하려면 캐릭터 사이에 감정적 접점이 한 층 더 쌓였어야 했습니다. 돈으로 시작된 관계가 의형제 수준으로 바뀌는 과정이 조금 더 촘촘했다면 노자라는 캐릭터가 훨씬 더 입체적으로 살았을 거라고 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들쥐 원작 웹툰을 먼저 봐야 드라마가 더 재밌나요?
A. 저는 원작 없이 드라마만 봤는데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카카오웹툰 루드비콘 작가의 원작을 각색한 작품이라 세부 설정에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드라마 자체가 독립적으로 완결된 서사를 갖추고 있습니다. 원작을 먼저 보면 비교하는 재미가 있고, 드라마를 먼저 보면 결말을 모른 채 더 긴장감 있게 볼 수 있습니다.
Q. 1, 2화가 지루하다고 하는데 그냥 스킵해도 되나요?
A. 저는 오히려 초반 빌드업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1, 2화는 재문제라는 인물의 고립된 일상을 차근차근 설명하는 구간인데, 이걸 건너뛰면 나중에 '왜 이 사람이 이렇게 취약했는가'가 이해되지 않습니다. 3화부터 사건이 본격적으로 연결되니 초반을 가볍게라도 흘려보시는 걸 권합니다.
Q. 결말이 어떻게 끝나요? 열린 결말인가요?
A. 스포일러를 최소화하자면, 답답하지 않게 마무리됩니다. 재문제도 드라마 안에서 완전히 무고한 인물이 아닌데, 그 부분에 대한 결말도 흐지부지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끝나고 나서 정체성과 죄의 대가에 대해 잠깐 생각하게 되는 여운이 남는 마무리였습니다.
Q. 폭력 수위가 심한 편인가요? 19세 등급이 이해가 되나요?
A. 19세 등급은 납득이 됩니다. 직접적인 폭력 묘사와 욕설이 꽤 있고, 특히 노자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수위가 높아집니다. 다만 자극적인 장면을 위해 넣은 것이 아니라 캐릭터 성격과 느와르적 분위기를 살리기 위한 연출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결론
정리하면, 《들쥐》는 소재 하나만으로 충분히 시청을 정당화할 수 있는 드라마입니다. 신분과 정체성이 디지털 데이터 몇 줄로 증명되는 시대에, 그 데이터가 통째로 사라졌을 때 벌어지는 일을 미스터리 스릴러로 풀어낸 방식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류준열의 1인 2역, 설경구의 노자, 이규영의 형사까지 3인방 밸런스도 잘 맞았습니다.
후반부 개연성이 흔들리고 에피소드 수가 조금 많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지만, 그 아쉬움이 앞의 장점들을 덮지는 못했습니다. 제 개인 티어로는 A입니다. 넷플릭스 구독 중이시라면 한번 쭉 이어보실 만합니다. 3화까지만 보시면 나머지는 알아서 손이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