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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하면 언젠가는 인정받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미생》을 처음 볼 때와 지금 다시 볼 때, 그 믿음에 대한 제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고졸 검정고시 출신의 장그래가 회사에서 살아남는 과정이 단순한 성장 서사가 아니라, 노력과 성과가 반드시 신분을 바꿔주지는 않는다는 현실을 정면으로 보여주는 드라마였습니다.
계약직 차별: 성과가 신분을 바꾸지 못하는 현실
《미생》에서 제가 알고 봐도 씁쓸했던 장면은 장그래가 직접 기획한 카자흐스탄 물탱크 수출 사업이었습니다. 재무팀 예산 승인까지 받아낸 아이디어였는데, 담당자가 계약직이라는 이유만으로 천 과장과 김동식 대리로 교체됩니다. 기획실은 "계약직 사원에게 사업을 맡길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고, 오히려 계약직에 대한 내부 규정을 강화하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계약직 차별 문제는 단순히 처우 문제가 아닙니다. 연봉 조정, 임금 인상, 인센티브뿐만 아니라 사업 담당자 자격 자체가 정규직과 다르게 적용됩니다. 쉽게 말해, 아이디어를 내고 성과를 만들어도 '내 것'이 될 수 없는 구조입니다. 제 경험상 이건 드라마 속 이야기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실제로도 비슷한 구조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르단 중고차 사업 재추진 제안도 마찬가지입니다. 장그래는 비리를 걷어내면 충분히 매력적인 아이템이라는 논리를 폈지만, 천 과장은 "전체를 보지 못하는 신입의 실수"라며 그의 역량으로는 감당하기 어렵다고 잘라 말합니다. 사업에 대한 판단 이전에, 신입 계약직이라는 신분 자체가 먼저 걸림돌이 되는 구조였습니다.
그럼에도 장그래는 포기하지 않고 PT 전략까지 직접 바꿔버립니다. 일반적으로 사업 보고서는 개요부터 시작하는 관습이 있는데, 장그래는 이 관습을 깨고 변명처럼 보이는 구조를 피해 '판을 흔드는' 방식으로 발표를 설계합니다. 지도에서 북쪽을 위로 두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듯, 보고 방식의 관습도 당연한 것이 아님을 증명해 보인 장면이었습니다. 실제로 그 PT는 임원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고, 제안자가 신입사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며 오히려 더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한국고용정보원 자료에 따르면, 비정규직 근로자의 정규직 전환율은 매우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출처: 한국고용정보원). 장그래가 정규직 전환 심사를 통과하는 과정이 드라마적 설정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보다 나은 결말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계약직은 사업 담당자 자격 자체가 제한됨 — 성과와 무관하게 적용되는 신분 제약
- 연봉 조정·인센티브·임금 인상 등 보상 체계에서도 정규직과 명시적 차별 존재
- 능력을 인정받는 것과 제도 안에서 인정받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
- 주변 동료들의 지지만으로는 회사의 매뉴얼과 시스템을 넘을 수 없음
오상식이라는 인물: 신념과 현실 사이에서 가장 지쳐가는 사람
처음 《미생》을 봤을 때는 장그래가 주인공이라 그에게 집중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보니 오상식 캐릭터가 훨씬 더 눈에 들어왔습니다. 제 경험상 회사에서 오래 버틴 사람이라고 해서 모든 상황을 무감각하게 받아들이는 건 아니더라고요. 위에서는 압박받고 아래 직원은 챙겨야 하고 자기 신념까지 지키려다 보면 결국 본인이 가장 많이 소진됩니다.
오상식은 2차 접대(entertainment expense)를 절대 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서 2차 접대란 계약 상대방을 술자리 이후 유흥업소 등으로 추가 안내하는 관행을 말합니다. 그는 문충기 대표와의 계약을 위해 1차에서 모든 것을 쏟아붓는 전략을 썼고, 새벽 3시까지 이어진 접대 끝에 상대방 아내의 결혼기념일을 이용한 반전으로 계약을 성사시킵니다. 이 장면은 신념을 지키면서도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동시에, 그 신념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하는지도 함께 보여줍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오상식은 장그래를 정규직으로 만들어줄 수 있다는 말 한마디에 포신(Poshen) 태양열 발전 사업을 덜컥 받아들입니다. 5억 달러 규모의 이 사업에는 꽌시(關係)라는 중국 특유의 인맥 기반 거래 관행이 개입되어 있었고, 에이전트 커미션 문제가 불거지면서 리베이트(rebate) 의혹으로 번집니다. 여기서 리베이트란 거래 금액의 일부를 불법적으로 되돌려주는 행위를 말합니다. 오상식의 신념이 흔들린 지점은 사리사욕이 아니라 팀원을 구하겠다는 마음이었기 때문에, 더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결국 전무의 비리가 감사팀에 제보되고, 오상식은 회사를 나가게 됩니다. 내부 고발(whistleblowing)이란 조직 내부의 비위 사실을 공식 기관에 알리는 행위로, 통상 제보자에게 불이익이 따르는 구조적 문제가 있습니다. 영업 3팀이 사장에게 칭찬을 받고 오상식이 차장으로 승진했음에도, 팀원들은 이 성과가 기쁘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내부 고발로 인한 불편한 시선이 그대로 남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장면에서 느낀 건 '정의로운 선택이 반드시 좋은 결과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불편한 사실이었습니다.
오상식이 마지막에 장그래에게 남긴 말은 "버텨라, 그리고 이겨라"였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남긴 본인은 회사를 나갔습니다. 이 아이러니가 사실은 이 드라마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버틴다는 게 한 자리에 계속 남아 있는 것과 동의어가 아닐 수 있다는 것. 오상식은 회사를 떠난 뒤에도 새 회사를 차리고 장그래에게 레드카펫을 깔아주겠다고 했으니까요.
직장 내 내부 고발과 관련한 법적 보호 제도는 국민권익위원회가 운영하는 공익신고자 보호 제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출처: 국민권익위원회). 드라마와 달리 현실에서는 이런 제도적 장치가 있음에도 내부 고발자가 받는 압력이 여전히 크다는 점이 안타깝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미생이 지금 봐도 공감되는 드라마인가요?
A. 제가 처음 봤을 때보다 회사 생활을 조금 경험한 뒤 다시 봤을 때 훨씬 더 와닿았습니다. 특히 계약직 차별이나 내부 고발 이후의 불편한 시선처럼, 열심히 한다고 모든 게 해결되지 않는다는 현실을 정면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직장인이라면 지금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드라마입니다.
Q. 오상식이 결국 회사를 나간 이유가 뭔가요?
A. 전무의 리베이트 비리를 감사팀에 제보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입니다. 포신 사업에서 에이전트 커미션 문제가 불거졌고, 오상식이 녹취록까지 증거로 제출하면서 전무는 계열사로 발령이 났습니다. 그 과정에서 오상식이 손댄 사업들이 모두 거절당하고 회사는 사실상 해고를 종용하는 상황까지 이어졌습니다.
Q. 장그래는 결국 정규직이 되나요?
A. 본사 차원에서 뛰어난 계약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지침이 내려오면서 장그래에게 기회가 찾아옵니다. 한성율이 사내 인트라넷에 장그래의 실적과 노력을 올린 것도 영향을 미쳤고, 최종 심사에서 과반수 통과를 받아 정규직 전환이 결정됩니다. 다만 드라마는 그것이 완전한 해피엔딩이 아니라는 뉘앙스를 남기며 끝납니다.
Q. 미생에서 '미생'이 무슨 뜻인가요?
A. 바둑 용어에서 가져온 개념입니다. 미생(未生)이란 아직 완전히 살아있지 않은 돌, 즉 완성되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반대 개념은 완생(完生)으로 완전히 살아있는 돌을 의미합니다. 오상식은 드라마 안에서 "아직 모두가 미생이며 완생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 단어 하나가 드라마 전체의 주제를 압축합니다.
Q. 미생을 처음 보려는데 어느 부분부터 집중해서 보면 좋을까요?
A. 제 경험상 초반부의 복사 실수와 문서 분실 에피소드가 장그래라는 인물의 출발점을 잘 보여줘서 건너뛰지 않는 게 좋습니다. 오상식의 캐릭터를 이해하려면 투르크메니스탄 BL 드래프트 사건과 포신 사업 비리 에피소드가 핵심입니다. 이 두 사건을 보면 왜 오상식이 단순한 좋은 상사가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
결론
《미생》이 오래 기억되는 이유는 회사 생활을 멋있게 포장하지 않아서라고 생각합니다. 장그래가 성장하고 성과를 내도 계약직이라는 신분은 그대로 따라다니고, 오상식이 올바른 선택을 해도 회사를 나가야 하는 결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능력을 인정받는 것과 제도 안에서 인정받는 건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걸 드라마 전체에 걸쳐 반복해서 보여줍니다.
'버텨라'는 말이 무조건 참으라는 뜻이 아닐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미생이라는 상태가 부끄러운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라는 것. 직장생활을 시작했거나 지쳐가고 있다면, 《미생》을 처음이든 다시든 한 번 더 보는 걸 권합니다. 장그래보다 오상식이 더 눈에 들어오는 시점이 온다면, 그때가 진짜 이 드라마를 본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