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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9분간의 기립박수를 받은 영화가 있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 수가 없다》입니다. 처음 이 소식을 접했을 때 솔직히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런데 직접 보고 나서는, 기립박수가 아깝지 않다는 생각보다 오히려 씁쓸함이 더 크게 남았습니다. 이 영화는 웃기는데 웃고 나서 마음이 이상한, 그런 영화입니다.
해고 통보 하나가 무너뜨린 것들
영화는 유만수가 가족과 바비큐를 즐기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집도 있고, 아내도 있고, 아이들도 있고, 제법 이룬 것처럼 보이는 삶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 첫 장면에서 이미 불안했습니다. 너무 완벽한 시작은 박찬욱 감독 영화에서 항상 추락의 전조이기 때문입니다.
예상은 맞아떨어졌습니다. 유만수는 미국계 사모펀드(PEF)의 인수로 인한 구조조정 과정에서 해고 통보를 받습니다. 여기서 사모펀드란 소수의 투자자로부터 자금을 모아 기업을 인수한 뒤 구조를 재편하고 수익을 극대화하는 투자 방식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회사를 사들인 뒤 비용을 줄이기 위해 사람부터 자르는 구조입니다.
유만수의 경우 일을 못해서 잘린 것이 아닙니다. 오래 일했다는 이유로, 즉 인건비가 높다는 이유로 정리 대상이 됩니다. 회사가 해고 전에 장어 선물을 돌렸다는 설정이 묘하게 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제가 직접 겪은 건 아니지만, 주변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인지 유독 그 장면이 오래 남았습니다.
해고 후 유만수는 3개월 안에 재취업하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런데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서 집을 팔아야 하는 상황까지 몰립니다. 대출금이 3억이 넘는 상황에서, 평생을 바쳐 마련한 집을 포기하라는 말은 단순한 재정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쌓아온 삶 전체를 부정당하는 것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블랙코미디가 불편해지는 순간
재취업에 실패를 거듭하던 유만수는 결국 기이한 선택을 합니다. 취업을 원하는 회사인 '문재'의 특수지 라인 반장 자리를 두고 경쟁할 것 같은 사람들을 미리 파악하고 제거하기로 한 것입니다. 허위 구직 광고를 올려 이력서를 받고, 등급을 매겨 제거 대상을 추리는 장면은 분명 블랙코미디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장면에서 마음 편하게 웃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거 대상으로 꼽힌 구범모, 고시조, 최선출. 이들을 하나씩 만나보면 유만수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한때 자기 분야에서 인정받았지만 지금은 어떤 식으로든 밀려난 사람들입니다. 유만수가 이들을 만나는 장면에서 연민과 동질감이 교차하는 것이 보입니다. 특히 구두 판매원이 된 고시조를 마주하는 장면에서 만수가 느끼는 불편함은 연출이 아니라 진짜처럼 읽혔습니다.
이 지점이 이 영화에서 가장 정교하게 설계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블랙코미디(Black Comedy)란 죽음, 범죄, 사회적 비극처럼 통상적으로 웃기 어려운 소재를 희극적으로 다루는 장르입니다. 여기서 웃음은 단순한 유머가 아니라 불편함을 견디게 해주는 장치이자, 동시에 그 불편함을 더 선명하게 느끼게 만드는 이중 장치로 작동합니다.
만수의 계획은 애초에 치밀하지도 않고, 제대로 되지도 않습니다. 술 취한 구범모를 찾아가 아내와 몸싸움 끝에 총이 발사되는 장면은 긴장과 웃음과 당혹감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이상한 경험이었습니다. 보는 내내 '이게 지금 웃겨야 하는 장면인가'를 계속 스스로 묻게 됩니다.
- 구범모: 유만수처럼 재취업에 실패하며 아내에게 벌레 취급 받는 구직자
- 고시조: 일본 경력이 있는 경쟁자였지만 결국 구두 판매원으로 전락한 인물
- 최선출: 문재 회사의 네임드 반장이지만 음주 문제를 안고 있는 인물
'어쩔 수가 없다'는 체념인가, 합리화인가
영화를 보는 내내 제목이 계속 다르게 들렸습니다. 초반에는 정말로 선택지가 없는 사람의 말처럼 들렸습니다. 구조조정이라는 외부의 힘에 밀려난 사람이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을 때 내뱉는 말처럼요. 그런데 중반을 넘어가면서부터 그 말이 조금씩 다르게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영화 속 도끼는 상징적입니다. 미국에서 해고를 'axe(도끼질)'로 표현한다는 설정에서 출발해, 만수가 경쟁자를 제거하는 행위로 연결됩니다. 미장센(Mise-en-scène)이란 프레임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적 요소, 즉 공간, 소품, 조명, 인물의 위치 등을 통해 의미를 전달하는 영화 언어입니다. 박찬욱 감독은 이 미장센을 통해 회사가 사람을 자르는 논리와 만수가 경쟁자를 제거하는 논리가 묘하게 닮아 있음을 보여줍니다. 필요 없는 존재를 도태시킨다는 점에서요.
제 경험상 이런 구조를 가진 영화는 대부분 관객에게 쉬운 판단을 유도합니다.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야'라는 거리를 주거나, 반대로 '어쩔 수 없었다'는 동정을 유도하거나. 그런데 이 영화는 그 두 가지를 모두 거부합니다. 만수에게는 계속 다른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집을 포기할 수도 있었고, 다른 일을 찾을 수도 있었고, 자존심을 내려놓을 수도 있었습니다. 영화는 그것을 조용하지만 집요하게 보여줍니다.
이병헌이 연기한 유만수는 이른바 '취약한 알파남'입니다. 여기서 알파남이란 집단 내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스스로 인식하는 남성 유형을 가리키는데, 그 지위가 흔들렸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이병헌은 과잉 없이 소화합니다. 공감할 수 없는 행위를 하면서도 동기만큼은 이해 가능하게 만드는 것, 그게 이 연기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손예진이 연기한 아내 미리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영화의 정서적 중심이라고 할 만큼, 현실적이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회복력을 가진 인물로 그려집니다.
그리고 아내의 불륜 의심, 휴대폰 도난, 최선출의 음주 문제처럼 주변 인물들에게서 드러나는 인간적 몰락의 징후들이 만수의 이야기와 겹치면서, 이건 만수 한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박찬욱 감독이 건축 공간을 통해 인물의 심리를 드러내는 방식, 새 남자의 저택이 주는 고립감과 과시욕의 이중성도 그런 연장선에서 읽혔습니다.
직업을 잃으면 나는 무엇으로 남는가
만수는 결국 원하던 자리를 얻습니다. 불 꺼져가는 공장에서 혼자 쾌재를 부르는 마지막 장면. 저는 이 장면이 이 영화에서 가장 뼈아팠습니다. 목표는 달성됐는데 이상하게 통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렇게까지 해서 지키려 했던 삶이, 정말 그만한 가치가 있었는지 자꾸 되물어지는 장면이었습니다.
영화는 만수 아버지가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귀국 후 쓸모가 사라지자 버려진 이야기를 은유로 사용합니다. 사회는 필요할 때 역할을 주고, 필요가 없어지면 조용히 제거합니다. 이 구조는 베트남전 참전 세대에서 오늘날 구조조정 세대로, 그리고 AI와 자동화가 노동의 의미 자체를 무력화하는 시대로 이어집니다.
출처: ILO(국제노동기구) 세계고용사회전망 2023에 따르면, 자동화와 디지털화로 인해 반복 업무 중심의 중숙련 일자리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습니다. 유만수가 평생을 바친 제지 업계의 숙련 반장 자리가 언제까지 안전할지 알 수 없다는 것, 영화는 그 공포를 직접 언급하지 않지만 분명히 담고 있습니다.
또한 출처: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를 보면, 40~50대 중장년층의 비자발적 이직 비율은 꾸준히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만수의 이야기가 유독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제일 묘했던 건, 만수의 선택에 동의할 수 없으면서도 그 감정의 뿌리만큼은 이해된다는 점이었습니다. '내 가족을 위해서'라는 말이 폭력의 당위로 변하는 순간을 보면서, 그 감정이 완전히 낯설지 않았습니다.
박찬욱 감독은 이 영화에서도 정밀하게 악마적입니다. 아름다운 미장센과 건축 미학으로 포장된 이야기 안에 자본주의가 사람을 소모하는 구조, 그 안에서 서로를 경쟁자로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된 사람들의 비극을 담아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단순한 범죄 스릴러나 블랙코미디가 아닙니다. 직업이 곧 정체성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그 직업을 잃었을 때 나는 무엇으로 남는가,라는 질문을 정면으로 던지는 작품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어쩔 수가 없다 원작이 있나요?
A. 있습니다. 미국 작가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소설을 박찬욱 감독이 각색한 작품입니다. 원작의 뼈대를 가져오되 한국의 중년 남성 노동 현실과 결합시켜 전혀 다른 정서의 영화로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Q. 베니스 영화제에서 9분 기립박수를 받은 게 사실인가요?
A. 네, 사실입니다.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9분간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화제가 됐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적 완성도와 이병헌, 손예진을 비롯한 배우들의 연기가 국제적으로도 높이 평가받은 결과로 보입니다.
Q. 어쩔 수가 없다, 폭력 수위가 심한 편인가요?
A. 박찬욱 감독 특유의 스타일리시한 연출이 적용된 영화라 폭력 장면이 없지는 않습니다. 다만 공포나 고어보다는 블랙코미디 방식으로 처리된 장면이 많아, 폭력 자체보다 그 상황의 아이러니에 집중하는 편입니다. 자극적인 장면보다 불편한 정서가 더 오래 남는 영화입니다.
Q. 이병헌과 손예진 케미가 볼 만한가요?
A. 둘의 조합은 예상보다 훨씬 잘 맞습니다. 이병헌이 흔들리는 알파남의 불안을 절제 있게 소화한다면, 손예진이 연기한 아내 미리는 현실적이면서도 감정적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입니다. 둘이 함께하는 장면에서 영화의 정서가 가장 또렷하게 느껴집니다.
Q. 영화 결말이 해피엔딩인가요?
A. 표면적으로는 만수가 원하던 자리를 얻는 것으로 끝납니다. 하지만 그것을 해피엔딩이라고 부르기 어렵습니다. 목표를 달성한 마지막 장면이 오히려 이 영화에서 가장 쓸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과정에서 잃어버린 것들과 여전히 남아 있는 질문들 때문입니다.
결론
《어쩔 수가 없다》를 보고 나서 제일 오래 남은 질문은 하나였습니다. 정말 어쩔 수 없었던 걸까, 아니면 어쩔 수 없다고 믿는 게 가장 쉬웠던 걸까.
이 영화는 해고당한 한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직업을 잃으면 존재론적 위기에 빠지는 남성의 보편적인 슬픔과 그것을 강요하는 시스템의 폭력을 동시에 다룹니다. 자본주의의 구조조정 논리, AI와 자동화가 몰고 오는 노동의 공포, 그리고 그 안에서 서로를 경쟁자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비극이 블랙코미디라는 형식 안에 정밀하게 담겼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전성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이 영화가 증명합니다. 웃기고, 불편하고, 끝나고 나서도 한동안 무언가 걸려 있는 느낌이 드는 영화를 찾고 있다면 이 작품을 권하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