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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를 보다가 악역인지 피해자인지 끝내 판단을 못 내린 적이 있으셨나요. 저는 티빙 오리지널 《친애하는 X》를 보면서 그 불편한 감각을 처음으로 제대로 경험했습니다. 백아진이라는 인물은 보는 내내 미워해야 할 것 같은데, 그게 생각처럼 쉽게 되지 않았습니다. 이 글은 그 감각이 어디서 오는지를 풀어보려는 시도입니다.
완벽한 이미지 뒤에 숨겨진 가면 구조
《친애하는 X》에서 제가 가장 먼저 주목한 건 백아진의 '퍼소나(Persona)' 설계 방식이었습니다. 여기서 퍼소나란 심리학에서 말하는 '사회적 가면', 즉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의식적으로 만들어낸 자아 이미지를 의미합니다. 백아진은 학교 안에서 똑똑하고 착하고 아름다운 인물로 통합니다. 하지만 그 완벽한 모습은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치밀하게 설계된 이미지라는 사실이 서서히 드러납니다.
제가 직접 회차를 돌려가며 확인해 봤더니, 백아진이 같은 상황에서 상대에 따라 표정과 말투를 전혀 다르게 쓴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 앞에서는 온순하고 감사할 줄 아는 학생, 성희 앞에서는 차갑고 계산적인 조종자, 준서 앞에서는 유일하게 취약한 면을 내보이는 존재. 이 세 가지가 전부 동일 인물입니다.
이런 다층적 가면 구조는 단순한 '이중성' 이상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인상 관리(Impression Management)라고 부릅니다. 쉽게 말해 상대방이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게 만들지를 능동적으로 통제하는 전략입니다. 백아진은 이걸 의식적으로, 그리고 고도로 정교하게 수행합니다. 단순히 거짓말을 하는 수준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누구의 말을 믿게 될지 구도 자체를 미리 설계한다는 점이 섬뜩했습니다. 성희를 고립시키는 과정이 특히 그랬습니다. 직접 공격하지 않고, 아무도 성희의 말을 믿지 않는 환경을 먼저 만들어두는 방식이었으니까요.
- 선생님·학생·준서 앞에서 각각 다른 퍼소나를 일관되게 유지
- 거짓말이 아닌 '신뢰 구도 설계'로 상대를 고립시키는 방식
- 인상 관리 전략이 드라마 전반의 갈등 구조를 이끄는 엔진 역할
소시오패스라는 단어가 편하게 붙여지지 않는 이유
작품 소개에서 백아진을 소시오패스(Sociopath)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시오패스란 반사회성 인격장애(ASPD, Antisocial Personality Disorder)의 구어적 표현으로,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람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성향을 말합니다. 진단 기준상으로는 충동성, 무책임, 죄책감 결여, 타인 조종 등이 포함됩니다(출처: 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
백아진의 행동 패턴은 분명 이 기준과 겹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학교 안에서 학생들의 약점을 잡아 수금하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선생님과 준서, 심지어 사장님의 선의까지 이용합니다. 특히 아버지를 처리하기 위해 사장님을 타이밍 맞게 설계된 상황 안에 집어넣는 장면은, 저도 보면서 잠깐 멈칫할 정도로 냉정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르게 봐야 할 부분이 있었습니다. 백아진은 준서에게만큼은 실제 감정을 드러냅니다. 준서 앞에서의 취약함이 연기처럼 보이지 않는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하고, "날 위해 어디까지 해줄 수 있어?"라는 질문도 차갑게 계산된 말이라기보다는 사랑을 검증하는 방식이 오직 그것밖에 없는 사람의 질문처럼 느껴졌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보호받지 못했고, 아버지에게 돈벌이 수단 취급을 받아온 환경이라면 타인의 호의를 순수하게 믿는다는 것 자체가 학습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애착 이론(Attachment Theory)에서도 초기 양육 환경이 이후 대인관계 패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합니다. 쉽게 말해, 어릴 때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반복적으로 배신당한 아이는 성인이 돼서도 친밀한 관계에서 상대를 믿기보다 시험하는 방식을 택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입니다.
다만 이 지점에서 작품이 한 가지 중요한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백아진의 과거를 보여주면서도 그것이 성희에게 가한 피해를 설명해 주는 면죄부가 되지 않도록 균형을 잡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경계를 쉽게 정리해 주지 않는다는 게, 이 드라마를 단순한 악녀물과 다르게 만드는 지점이었습니다.
이 드라마가 생존 서사로 읽히는 구조
《친애하는 X》를 보면서 제가 계속 떠올린 건, 이것이 단순히 '나쁜 여자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감각이었습니다. 드라마 전반에 깔린 정서는 오히려 극단적인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가진 자원을 최대한 활용한 사람의 이야기에 가깝습니다. 아버지는 딸을 돈벌이 수단으로 생각하고, 보호자 없이 홀로 학창 시절을 버텨야 했던 백아진에게 인간관계는 감정의 영역이 아니라 생존의 영역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회심리학에서는 자원이 극도로 제한된 환경에 오래 놓인 사람이 타인을 자원으로 인식하는 인지 패턴을 발달시킬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출처: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여기서 자원이란 단순히 돈이나 물질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인맥, 신뢰, 평판, 타인의 호감까지 모두 포함됩니다. 백아진이 주변 사람들에게 접근하는 방식을 보면 이 틀이 꽤 정확하게 들어맞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제가 처음 이 드라마를 시작할 때는 통쾌한 악녀 서사를 기대했거든요. 그런데 회차가 쌓일수록 백아진이 더 나쁘게 보이기보다는, 이 사람이 다르게 살 수 있는 조건이 애초에 주어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습니다. 특히 등록금이 미납으로 처리돼 대학 입학이 취소되는 장면, 그리고 졸업식 앞에서 여전히 아버지의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장면은 꽤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준서라는 인물도 이 맥락에서 다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준서는 백아진을 지키려 하지만, 그 보호가 결과적으로 백아진이 계속 같은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게 만드는 구조적 지지대가 됩니다. 한 사람을 무조건 사랑한다는 것이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지를 이 드라마는 꽤 집요하게 물어봅니다. 그리고 저는 그 질문에 쉽게 답을 낼 수가 없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친애하는 X 백아진이 진짜 소시오패스인가요?
A. 작중 행동만 놓고 보면 반사회성 인격장애(ASPD)의 일부 기준과 겹치는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준서에게 취약함을 드러내는 장면이나 어린 시절 학대 환경이 구체적으로 묘사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타고난 성향보다는 극단적 환경에서 학습된 생존 패턴으로 읽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드라마 자체도 이 경계를 명확히 규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서사를 이끌어갑니다.
Q. 친애하는 X는 원작 웹툰과 많이 다른가요?
A.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하지만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는 인물 서사를 상당히 확장한 편입니다. 특히 백아진의 어린 시절과 아버지와의 관계, 준서와의 과거가 더 구체적으로 다뤄지면서 인물을 단순 악역으로 규정하기 어렵게 만드는 층위가 추가됐습니다. 원작 팬이라도 드라마판에서 새로운 감각을 느낄 수 있는 구성입니다.
Q. 김희정 배우가 백아진 역을 맡았나요?
A. 네, 맞습니다. 기존 이미지와 완전히 다른 파격 변신으로 화제가 됐습니다. 특히 같은 장면 안에서도 상대에 따라 표정과 태도를 달리 가져가는 섬세한 연기가 이 드라마의 몰입도를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이 인물이 이렇게까지 입체적으로 느껴지는 데는 연기의 비중이 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Q. 친애하는 X 어디서 볼 수 있나요?
A. 티빙(Tving) 오리지널 시리즈로, 티빙 앱 및 웹사이트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구독 요금제에 따라 이용 조건이 다를 수 있으니 티빙 공식 채널에서 확인하시는 편이 정확합니다.
결론
《친애하는 X》는 '악녀물'이라는 장르 문법을 가져다 쓰면서도 그 안에서 꽤 불편한 질문을 끝까지 놓지 않는 작품입니다. 백아진이라는 인물을 보면서 저는 결국 "이 사람을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보다 "누군가의 상처를 이해하는 것과 그 행동까지 받아주는 것은 다른 문제다"라는 생각을 더 오래 했습니다. 그 불편함이 드라마가 끝난 뒤에도 남는다는 게, 이 작품이 흔한 복수극과 다른 지점입니다.
퍼소나, 인상 관리, 애착 이론, 생존 서사라는 렌즈를 통해 보면 백아진의 행동이 단순한 악의보다 훨씬 복잡하게 읽힙니다. 그 복잡함을 끝까지 해소해 주지 않는 구성 덕분에, 제가 오랜만에 한 드라마를 두고 이렇게 길게 생각하게 됐습니다. 강하게 추천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