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봤던 영화를 다시 틀었을 때, 처음 봤을 때와 전혀 다른 장면에서 멈추게 된 경험이 있습니다. 《써니》가 딱 그랬습니다. 분명히 같은 영화인데, 제가 달라져 있었습니다. 시끌벅적한 학창 시절의 우정과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어른들의 이야기가 교차하는 이 영화, 오랜만에 다시 보니 생각보다 훨씬 많이 아련했습니다. 학창 시절: 전학생 나미가 써니에 합류하기까지처음 봤을 때 제가 제일 좋았던 부분은 솔직히 이 고등학교 장면들이었습니다. 전학 온 나미가 낯선 교실에 혼자 앉아 있다가, 춘화를 만나면서 서서히 무리에 섞여 들어가는 과정이 어찌나 생생하던지, 저도 저 자리에 끼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영화는 교차편집(cross-cutting) 방식으로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이야기를 엮습니다. 여..
조폭 영화라고 하면 보스 자리를 두고 피 터지게 싸우는 장면이 먼저 떠오르지 않습니까? 저도 처음 《보스》라는 제목을 봤을 때 그런 영화일 거라 단정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방향이 완전히 반대였습니다. 아무도 보스가 되고 싶지 않은 조폭 영화, 그 역설이 이 작품의 전부입니다.설정 반전: 전설의 에이스가 왜 칼 대신 식칼을 잡았나영화의 주인공 문태는 전국을 제패했던 조직의 에이스 출신입니다. 여기서 '에이스'란 단순히 싸움 잘하는 조직원이 아니라, 조직 전체의 전력을 좌우하는 핵심 인물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런 인물이 지금은 식재료를 써는 요리사로 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설정, 제가 직접 영상으로 접했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문태가 조직을 떠나기로 한 이유는 권력 다툼에 지쳐..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9분간의 기립박수를 받은 영화가 있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 수가 없다》입니다. 처음 이 소식을 접했을 때 솔직히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런데 직접 보고 나서는, 기립박수가 아깝지 않다는 생각보다 오히려 씁쓸함이 더 크게 남았습니다. 이 영화는 웃기는데 웃고 나서 마음이 이상한, 그런 영화입니다.해고 통보 하나가 무너뜨린 것들영화는 유만수가 가족과 바비큐를 즐기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집도 있고, 아내도 있고, 아이들도 있고, 제법 이룬 것처럼 보이는 삶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 첫 장면에서 이미 불안했습니다. 너무 완벽한 시작은 박찬욱 감독 영화에서 항상 추락의 전조이기 때문입니다.예상은 맞아떨어졌습니다. 유만수는 미국계 사모펀드(PEF)의 인수로 인한 구조조정 과정에서 해고..
왕자들이 차례로 피를 토하며 죽고, 궁 안에는 30년 전 선왕 시절의 저주가 되살아났다는 소문이 퍼진다. 《동궁》은 귀신을 베는 구천과 귀신의 목소리를 듣는 생강이 왕실의 원한을 파헤치는 이야기다. 솔직히 처음 예고편만 봤을 때는 전형적인 퇴마 사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보고 나서는 생각이 꽤 달라졌습니다.원귀의 정체 — 귀신보다 사람이 더 무서웠던 이유《동궁》을 보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원귀(冤鬼)의 구조였습니다. 여기서 원귀란 억울하게 죽어 이승에 한을 남긴 혼령을 뜻하는데, 단순히 사람을 해치는 악령이 아니라 누군가의 죄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는 점이 이 영화의 핵심입니다.처음에는 궁 안 연못에 얽힌 귀신이 누구인지 밝혀내는 이야기가 중심인 줄 알았습니다. 구천이 귀의 세계(이승과 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