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 드라마를 보다가 답답해서 리모컨을 들었다 내려놓은 경험이 있으신지요. 《중증외상센터》를 처음 틀었을 때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보고 나서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백강혁 한 사람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시스템과 팀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백강혁이 싸우는 건 질병만이 아니었습니다처음에는 솔직히 백강혁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이 드라마의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헬기를 타고 현장에 뛰어들고, 다른 의사들이 망설이는 순간에 이미 메스를 들고 있는 장면들이 반복되다 보니 그냥 '실력 좋은 외과의사 영웅담'으로만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보다 보니 이 드라마의 진짜 갈등 구조는 거기에 있지 않았습니다.백강혁이 맞서는 건 부상 자체보다 오히려 그 주변의 것들이었습니다. 헬기를 띄우려면 행정 결재가..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처음 볼 때 가벼운 세대 차이 코미디쯤으로 생각했습니다. 70대 노인이 패션 스타트업에 인턴으로 들어간다는 설정이 그냥 웃기려고 만든 장치인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보고 나서 한참 동안 머릿속에 남은 건 웃음이 아니라 '나는 직장에서 저런 사람이었던 적이 있었나'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인턴》은 세대 갈등을 다루는 척하지만 결국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는 영화입니다.벤 휘태커가 신뢰를 얻는 방식주인공 벤 휘태커는 40년 가까이 직장 생활을 했고, 전화번호부 제작 회사에서 부사장(VP, Vice President)까지 지낸 인물입니다. 여기서 VP란 조직의 주요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고위 관리직을 의미하는데, 그런 경력을 가진 사람이 뉴욕 브루클린의 의료 패션 스타트업 A..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노인의 외형으로 태어나 점점 젊어지는 남자의 일생을 따라가는 2008년작 영화입니다. 러닝타임이 무려 166분에 달하는 이 작품을 처음 봤을 때, 저는 설정의 기이함보다 오히려 영화가 끝난 뒤 한동안 아무 말도 하기 싫었던 감각을 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노인으로 태어나 아이로 죽는다 — 이 설정이 생긴 배경이 영화의 원작은 《위대한 개츠비》로 유명한 작가 F. 스콧 피츠제럴드가 1922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벤자민 버튼의 기이한 사건」입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쓰인 작품으로, 전쟁으로 청춘을 잃어버린 젊은 세대를 풍자하는 블랙 코미디에 가까웠습니다. 여기서 블랙 코미디란, 비극적이거나 불편한 현실을 유머나 역설로 비틀어 표현하는 문학적 장치를 말합니..
결말을 알고 다시 봐도 감정이 전혀 덜하지 않은 드라마가 있을까요? 저는 추석 연휴 동안 《미스터 션샤인》을 두 번째로 정주행하면서 그 질문에 스스로 답을 얻었습니다. 처음 봤을 때보다 오히려 더 많이 울었고, 더 많은 장면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결말을 아는 상태에서 보는 초반의 평범한 대사들이 이렇게 다르게 읽힐 줄은 몰랐습니다.서사 구조: 16회 분량이 왜 전혀 늘어지지 않는가《미스터 선샤인》은 총 24부작으로, 평균 방영 시간이 회당 70~90분에 달합니다. 단순 계산만 해도 총 시청 시간이 30시간에 육박하는 방대한 분량입니다. 여기에 유진 초이, 고애신, 구동매, 김희성, 쿠도 히나라는 다섯 명의 주요 인물이 각자의 서사를 갖고 동시에 진행되니, 처음 보는 입장에서 인물 관계를 따라가는 데 상당..
솔직히 저는 《사내맞선》을 처음 볼 때 그냥 흘려보내려 했습니다. 재벌 사장에 사내 연애, 가짜 커플 설정까지, 봐도 봐도 비슷한 구조 아닌가 싶었거든요. 그런데 막상 보고 나서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뻔한 설정을 이렇게 설레고 웃기게 살려낼 수 있다는걸, 제가 직접 보기 전까지는 반신반의했습니다.클리셰 총집합인데 왜 계속 보게 되나로맨틱코미디(romantic comedy), 줄여서 로코라고 부르는 장르는 수십 년째 비슷한 공식을 반복합니다. 여기서 로코란 남녀 주인공이 오해와 우연을 반복하며 결국 사랑에 빠지는 구조를 기본으로 하는 드라마 장르를 말합니다. 《사내맞선》은 그 공식을 숨기기는커녕 아예 한 화면에 몰아서 꺼내놓습니다.제가 직접 확인한 것만 해도 이 정도입니다. 재벌 남자 주인공과 평범..
헬리콥터로 도주 차량을 추격하는 형사가 현실에 존재할 수 있을까요? 처음 이 장면을 봤을 때 저는 솔직히 "이건 좀 너무 나가는 거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회차가 거듭될수록 재벌 설정이 단순한 볼거리가 아니라 사건 해결의 핵심 도구로 작동한다는 걸 깨달았고, 그때부터 제대로 빠져들었습니다. 재벌과 형사라는 두 극단이 부딪히면서 만들어지는 수사물, 《재벌X형사》의 구조를 제 시각으로 뜯어봤습니다.재벌 설정이 '장식'이 아닌 이유보통 한국 드라마에서 재벌 캐릭터는 로맨스의 상대방이거나 악역의 배경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재벌 X형사》가 다른 지점은 재벌 3세 진이수의 배경이 수사 방법론 자체를 바꿔놓는다는 데 있습니다. 저는 이 드라마를 보면서 "같은 사건을 일반 형사가 수사했다면 어느 단계에서..
솔직히 처음 봤을 때는 반신반의했습니다. 취업에 계속 떨어지는 백수가 주인공인 재난 영화라니, 어딘가 어색하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그런데 막상 보고 나니 오히려 그 설정 때문에 끝까지 눈을 못 떼게 되더군요. 평소에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능력이 딱 하나의 위기 앞에서 모든 걸 바꾸는 이야기, 영화 《엑시트》가 그렇습니다.클라이밍이 백수의 무기가 된 순간제가 이 영화를 다시 꺼내 본 건 순전히 주인공 용남이라는 캐릭터 때문입니다. 대학 시절 클라이밍 동아리의 에이스였지만, 졸업 후에는 취업에 계속 실패하면서 공원 철봉이나 매달리는 사람 취급을 받습니다. 가족들 눈에도 그저 체격만 좋은 백수죠.그런데 어머니 칠순 잔치가 열린 '구름 정원'이라는 연회장에서 갑자기 도심 전체를 덮는 유독가스 테러가 발생합니다..
솔직히 저는 《정년이》를 처음 볼 때 그냥 '재능 있는 주인공이 고생 끝에 성공하는 이야기'겠거니 했습니다. 그런데 시작 몇 분 만에 그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는 걸 알았습니다. 1956년 목포, 생선 파는 딸이 어떻게 여성 국극이라는 무대 위에 서게 되는지, 그 과정이 예상보다 훨씬 덜 매끄럽고 그래서 오히려 더 진짜 같았습니다.천구성이 뭔지도 몰랐던 정년이 처음 무대와 마주한 순간제가 이 드라마에서 가장 먼저 눈여겨본 건 정년이 자신의 재능을 전혀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시장에서 생선을 팔면서 무심코 소리를 냈을 뿐인데 지나가던 사람들이 발을 멈추고 돈을 꺼내 놓습니다. 정년 본인은 그게 왜 그런지 모릅니다. 엄마는 그 소리를 아예 금지시켜 버립니다.여기서 등장하는 개념이 바로 천구성(..
솔직히 처음엔 그냥 무협 판타지 드라마려니 하고 틀었습니다. 그런데 장욱과 부연의 관계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 순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얼음돌을 품고 세상에서 가장 강해졌지만 죽고 싶을 만큼 외로운 남자, 그 앞에 나타나 대뜸 혼인해달라는 여자.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단순한 기억상실 로맨스가 아니라, 모든 진실을 알게 된 뒤에도 다시 그 사람을 선택하는 이야기였습니다.둘의 시작이 생각보다 웃기다제가 직접 다시 봤는데, 장욱과 부연의 첫 만남은 정말 예측 불가였습니다. 장욱은 얼음돌(冰石)을 품고 살아 돌아온 인물입니다. 여기서 얼음돌이란 극 중 설정상 감당하기 어려운 냉기의 기운을 지닌 돌로, 이것을 품은 자는 세상 누구도 당해낼 수 없는 신력(神力)을 갖게 되지만 그 대가로 극심한 고통과 죽음에 대..
오래전에 봤던 영화를 다시 틀었을 때, 처음 봤을 때와 전혀 다른 장면에서 멈추게 된 경험이 있습니다. 《써니》가 딱 그랬습니다. 분명히 같은 영화인데, 제가 달라져 있었습니다. 시끌벅적한 학창 시절의 우정과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어른들의 이야기가 교차하는 이 영화, 오랜만에 다시 보니 생각보다 훨씬 많이 아련했습니다. 학창 시절: 전학생 나미가 써니에 합류하기까지처음 봤을 때 제가 제일 좋았던 부분은 솔직히 이 고등학교 장면들이었습니다. 전학 온 나미가 낯선 교실에 혼자 앉아 있다가, 춘화를 만나면서 서서히 무리에 섞여 들어가는 과정이 어찌나 생생하던지, 저도 저 자리에 끼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영화는 교차편집(cross-cutting) 방식으로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이야기를 엮습니다. 여..
